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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변화에 따른 군복의 변천사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한국군이 창군된지 63년만에 신형전투복이 보급됐다. 올해 국군의 날부터 보급된 신형전투복은 적에게 잘 관측되지 않는 전투적인 측면, 소재의 기능성 측면, 전투 활동성과 착용감 을 고려한 고기능성 전투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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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군 뿐만 아니라 외국군도 전투복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군복은 전쟁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는 뿐만 아니라 명예를 나타내는 중요한 치장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장군들도 이때문에 전투복외에 정복 등 4벌의 군복이 더 가지고 있다.

군복이 처음부터 위장 등 기능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군복의 색깔은 인류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 눈에 잘 띄는 화려한 색과 형태인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무기가 발달하지 못해 모든 전투가 근접전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칼이나 창과 같은 내병기를 쓰던 시대라면 부대가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매우 조밀한 밀집대형을 형성해야한다. 때문에 전투시에는 피아가 뒤섞이는 혼전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위장효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쉬운 피아식별, 그리고 사기진작을 위한 눈에 잘 띄는 색과 디자인이 최고였던 셈이다.

기원전 2500년께 수메르 병사들은 전신보호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했다. 근접한 적과 육탄전을 벌이며 칼과 창을 막아내기 위한 방패, 그리고 무기가 그들이 필요한 전부였다. 사막지형에서 걸어서 이동해야하는 이들은 긴 킬트를 걸칠 뿐 두꺼운 옷은 벗어버렸다.



화려한 치장은 군대의 명예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장식이다. 망토나 투구의 깃털장식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고 내부적으로는 계급을 나타낸다.

기원전 300년께 알렉산더 대왕의 보병은 청동보호구로 가슴을 보호하고 깃털장식 투구를 썼다. 이는 무적을 자랑하던 용맹스러운 군대의 상징이었다.

영국 와실근위대 복장은 현존하는 최고의 군복으로 손꼽힌다. 장미전쟁을 끝내고 절대왕정을 연 헨리 7세가 1485년 만들었다. 지금은 의전용으로만 유지하고 있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이 대표적이다. 화려하기로는 푸른색과 주황색 줄무늬의 로마 교황청 수비대 군복이 으뜸이다. 이 수비대 군복은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경향은 무기가 발달해 장거리 공격이 가능해진 수백년동안 지속된다. 총격전이 시작된 초창기에도 흑색화약이 엄청난 연기가 발생했기 때문에 단 몇발의 일제사격만으로도 전장은 자욱한 연기로 뒤덮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거리 공격이 가능해진 총기류가 발달하자 화려한 군복의 시대는 마감하게 된다.

인도의 용병대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영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흰색 군복은 저격병에게 좋은 표적이었던 것이다. 견디다 못한 영국군은 흙먼지를 군복에 비벼 위장했다. 이것이 '카키색'의 연원이다. 카키는 힌두어로 흙지를 뜻한다.



미국 독립군 민병대원들 중 상당수는 당시에 신무기인 라이플, 즉 강선이 총열에 파인 소총을 사용함으로써 당시엔 파격적인 200~300m의 교전거리를 달성한다. 이로 인해 군대의 대열도 밀집대형에서 산개전투형식으로 바뀌었고 자신의 몸을 숨기는 것이 전술적으로 엄청난 우위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에 영국 육군은 미국 독립군의 복장과 장비를 받아들여 '라이플 연대'를 창설하고 진한 녹색계열의 군복을 입고 라이플을 구비했다. 전투시에도 대규모의 밀집대형이 아닌 소부대 단위로 산개해 적과 싸웠다.

실용성이 중요하지만 군복은 늘 패션도 추구했다. 나치 친위대 복장은 프로이센의 전통 군복에 디자이너 휴고보스가 선을 살렸다고 한다. 참호에서 비를 피하던 영국군 외투는 트렌치코트 유행을 만들었다. 이를 디자인한 버버리는 아예 보통명사가 됐다.

우리나라 군복의 역사도 짧지 않다. 고구려 고분벽화엔 장식 달린 투구를 쓰고 갑옷으로 무장한 무인이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오면 화려하고 다양한 모양의 군복이 나타난다. 서구식 군대 복장은 구한말 고종때 도입됐다. 입는 용도에 따라 대예장 군장, 예장, 반예장, 상장 등으로 구분한게 특징이다.

우리 군은 1973년 채택된 후 1990년 무늬만 얼룩으로 바꾸었을 뿐 거의 그대로 입던 것을 이제야 교체한다니 늦은 감은 있다. 하지만 색다른 이번 군복은 한국군의 전투력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새로운 군복에 예비군들이 귀가 솔깃할 가장 큰 특징은 군복에 주름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군복은 각 군별, 사단별로 특색있게 주름을 잡아 나름대로의 멋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주름이 필요없는 군복으로 바뀌어 주름잡는 군복은 추억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국방부와 지식경제부가 체결한 양해각서(MOU)를 바탕으로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한국생산기술연구원, 건국대 I-Fashion 의류기술센터 등이 개발에 참여해 전투복에 적합한 소재를 골라냈다. 개발팀은 “세탁 후 다림질이 불필요하다”고 설명할 정도다. 여기에 인장강도와 인열강도도 높이는 등 재질 자체도 튼튼하다. 신형 전투복에 사용된 원사는 고신축성 폴리에스테르 필라멘트사로 신장률 4.7% 이상, 신장 회복률은 79% 이상으로 신축성을 향상시켰다.

적외선 반사가 적게 되도록 가공해 적 관측장비에 탐지도 잘 되지 않는다. 땀을 빨아들이고 빠르게 마르게 하는 ‘흡한속건’ 기능도 우수하다. 흡수 속도는 10분 내 50% 이상, 건조 속도는 115분 이하다.

현대 군복에서 위장 능력은 핵심적인 기본 기능 중 하나다. 차세대 신형 전투복은 위장을 위해 현행 4색 얼룩무늬 대신 5색 디지털무늬를 선택했다. 최근 세계 군대는 잇따라 디지털무늬를 전투복과 장비 도색에 적용하고 있다. 픽셀화된 디지털무늬는 각종 첨단장비로 관측할 때도 뚜렷한 형태를 식별하지 못하게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개발팀은 1단계로 우선 우리나라 자연의 4계절 사진과 북한의 환경 사진을 수집해 색상을 단순화한 후 표준색상을 추출했다. 2단계로 자연적인 곡선과 인공적인 직선 모양을 혼합해 위장 패턴을 만든 후 이를 디지털시대에 맞게 픽셀화했다. 이후 산악·숲길 등 다양한 지형에서 가상시험을 한 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색상을 선정했다. 3단계로 야간 관측장비로 기존의 국내외 군복과 비교해 야간 위장 효과 실험까지 거쳤다.

이런 과정을 거쳐 흙색, 침엽수색, 수풀색, 나무줄기색, 목탄색 등 5색에 국내 암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강암의 형태와 그 주변의 지형지물을 응용한 무늬가 결합된 ‘화강암 디지털 5도색’ 위장무늬가 최종적으로 탄생했다.

개발팀들은 또 전투복의 패턴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남윤자 서울대 교수가 이끈 패턴개발팀은 장병 324명을 동원해 3차원 정밀 인체스캐너로 체형과 치수를 정밀 분석했다. 그냥 정지 동작만 체크한 것이 아니라 사격 자세 5종, 유격 자세 4종, 각개전투 동작 4종 등 군인의 동작을 3차원으로 분석해 전투복의 맞음새(fitting)를 마무리했다. 여기에 치수체계도 상의는 44개, 하의는 40개로 세분화했다.

양낙규 기자 if@

by redcat100 | 2011/10/08 13:45 | 군사 관련 잡동사니 글 모음 | 트랙백 | 덧글(0)

사라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새(國璽)를 찾다(2009. 3. 17)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원판필름의 사진과 일치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大韓帝國)시기 국새가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바로 그 국새이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17일 고종황제가 사용했던 국새를 공개했다. 이 국새는 문화재청이 국외반출 중요우리문화재에 대한 환수의 일환으로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해 지난해 12월 소장하게 된 것이다.

국새는 외함이 분실되고 내함만 남아있는데 전체높이 4.8cm,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는 거북형이며, 비단실로 짜여진 끈이 달려있다. 정사각형의 인장면에는 “皇帝御璽”라 양각되어 있다. 내함은 황동의 재질로, 2단으로 되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도록 되어있고, 그 윗단에 국새를 넣는다.

성분분석결과, 거북형손잡이는 은과 금의 비율이 81:18이며, 몸체는 57:41의 비율로 제작되었고,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새의 글씨 중 황제의 “皇”은 “白”의 아래에 “王”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어새에서는 “自”의 아래에 “王”으로 표기되었다.



고종황제가 독일, 이태리,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통의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두 종류가 확인되고 있는데, 한 종류는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둥글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다른 한 종류는 1906년에 러시아황제 등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각이 지고 반듯한 분위기이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번 확인된 국새에 대한 제작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광무5년 11월 16일)으로 미루어 1901~1903년 사이에 제작되어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국새는 공문서가 아닌 친서에 주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비밀리에 제작되어 고종황제가 직접 소지하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문서에는 “대한국새” “황제지보”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원래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어보(御寶, 의례용)와 국새(國璽, 실무용)를 비교해보면, 어보의 무게는 3.4kg으로 국새의 4배에 달하며, 크기에도 큰 차이가 있다. 주재료에 있어서 어보는 은과 구리가 주성분인 반면, 국새는 은과 금으로 제작되어 의례용과 실제 사용함에 있어서의 구별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국새 확인의 의의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유리원판사진 등으로만 전해져 오던 바로 그 실물이 확인되었다는 것과 국외반출 된 우리 중요문화재를 구입을 통해 환수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국새가 찍힌 친서의 내용 중에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제국의 황제로서 주변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어 대한제국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점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 국새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국보) 지정신청을 함과 동시에 적절한 시기에 일반시민들에게 특별공개 할 예정이다. 또한 덕수궁 석조전의 대한제국실이 복원되면 고종관련 자료 전시에 활용할 계획이다.

by redcat100 | 2009/03/17 17:56 | 덧글(0)

[인문학 산책] 500년전 세종의 국가 경영 키워드 '食民天'(한국경제, 2008. 12. 6)



세종대왕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대보라면 한글창제 하나를 들고 머뭇거린다. 조금 있다가 과학기술의 발달을 답하면 우수한 편이다. 명성에 비하면 홍보가 덜 되어 한국사 전공자로서 안타까운 책임감을 느낀다.

대왕은 1397년(태조 6),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 해 태어났다. 아버지가 잦은 가뭄 앞에 부덕을 자책하면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 그는 23세의 청년이었다. 32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1450년에 53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치적은 수백년간 '동방의 요순'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글창제,과학기기 제작만으로는 가당치 않은 극찬이다. 무슨 일을 했던가.

세종은 즉위 다음 해 집현전(集賢殿)을 세워 유능한 신하들을 학사로 뽑아 여기서 일하게 했다. 10명에서 시작해 최대 20명까지 늘렸다. 6품 이상의 관원수로는 중앙 관서 중 최다였다. 집현전 학사는 로테이션 근무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타 관서 경력이 승진에 유리한 관례를 깨고 부제학 이하 집현전 전임관은 고과 서열 1위로 쳐주어 한눈팔 필요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전문성 부여 인재육성정책을 쓴 것이다. 각종 행정 실무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집단을 양성한 것이다.

세종은 재위 10년까지는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유교국가가 나아갈 방향과 갖춰야 할 제도를 연구하게 했다. 이렇게 기초를 잡은 다음에 특화된 시정에 착수했다. 첫째 과업은 농정이었다. 농업은 당시 경제의 80~9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으니 중농정책의 표방은 곧 왕정의 1순위를 경제발전에 둔 것이다. 그는 "먹을거리는 백성의 하늘(食民天)"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올렸는데 국가경영의 의지를 잘 드러낸 말이다.

이전 왕조인 고려는 불교국가였지만 말기가 되면 유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내세만 강조하는 불교로서는 다스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세종대왕은 말로만 민본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어야 민본을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농사는 고려시대까지도 지력회복을 위해 한두 해씩 땅을 놀리는 휴한방식을 썼다. 고려 말에 볏을 단 보습(농기구의 일종)이 등장해 이런 제약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종 당대에도 이 선진 기술은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에 제한돼 있었다. 세종은 재위 11년에 농사를 아는 집현전 학사를 뽑아 그 선진농업기술을 채방하여 '농사직설'이란 책자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평안도,함경도까지 보내 거기서도 선진농업기술을 써보게 했다. 전 국토의 선진 농업지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부단한 노력으로 이 과제가 달성됨으로써 백성의 생활도 향상되고 나라의 세수도 늘었다. 새 기술은 거름주기가 가능해져 단위면적 생산력을 크게 높여 국가와 백성의 경제를 한꺼번에 향상시켰다.

왕은 기술보급정책과 동시에 세제 개혁을 검토했다. 농사짓는 기술이 달라졌으니 세제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질의 등급을 3등에서 6등으로 세분하고 풍흉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 새 제도의 초점이었다. 이를 위해 왕은 두 차례 18만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현직 관리,향촌의 유력자 외에 촌민까지 대상으로 한 조사였다.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던 일이다. 토질의 등급 구분은 어렵지 않지만 고을별 풍흉의 정도 측정이 난제였다. 그러나 이 난제도 세자(나중의 문종)가 측우기를 발명함으로써 해결을 보았다. 각 고을에 측우기를 설치해 비온 시각과 내린 양을 재서 도의 감사를 거쳐 호조에 보고되도록 해 가을 전세 결정 회의에 자료로 삼았다. 전품 6등,연분 9등의 신 세제는 측우기 발명 직후인 재위 26년에 확정 반포됐다.

대왕은 농시를 특별히 강조했다. 기술 집약화에 따른 필수사항이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본국력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4년부터 경복궁의 위도를 측정하는 각종 천문기구를 만들고 이어 시각 측정기구들을 제작해 그 성과를 근거로 재위 24년에 '칠정산내편'이란 '본국력'을 만들었다. 세종대의 천문기구는 전적으로 올바른 농정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왕은 또 이런 기구들이 설치된 경복궁의 뒤뜰에서 한 뙈기의 땅에 '농사직설' 에 적힌 기술대로 직접 농사를 지어보았다. 스스로 땅을 갈고 씨 뿌리고 김매기를 한 결과는 경기도 일반 농가보다 몇 배였다.

왕은 농정의 주요 과제가 거의 이뤄진 시점인 재위 27년에 '권농교서'를 내린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다음 신하들에게 백성이 농사 잘 짓게 이런저런 일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같은 해 '용비어천가'를 짓게 했다. 이즈음 또 백성들이 쉽게 제 뜻을 적을 수 있는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세종대왕의 치적은 내 백성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지혜와 노력의 힘으로 달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요순도 하지 못한,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최고의 경영인으로 평가받을 업적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by redcat100 | 2009/03/04 13:06 | 기사 모음 | 덧글(0)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조선일보, 2009. 2. 28)

● 서울대 이태진교수, 日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 사본 입수
"데라우치·하세가와 총독이 독살 배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 나서자 제거" 고종황제 죽음과 관련 구체적 정보 기록

꼭 90년 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종(高宗) 황제의 죽음이 일본측의 지시에 의한 독살(毒殺)이었다는 정보를 기록한 당시 일본 고위 관료의 문서가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 문서는 1919년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의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1853~1948)가 쓴 일기로, ▲고종 독살의 배후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있었으며 ▲독살의 이유는 고종이 독립운동에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궁내성 내의 정보를 기록했다. 고종 독살의 개연성을 언급한 국내 자료는 많았지만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개입했다는 구체적 정황과 실명을 기록한 일본측의 문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의 해당 부분 사본을 입수하고 이 사실을 27일 본지에 공개했다. 이 교수는 일본 교토(京都)대 나가이 가즈(永井和) 교수의 홈페이지를 통해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됐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오는 4월 23일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말을 듣지 않아… 은폐하려 죽였다"

구라토미는 다이쇼(大正) 8년(1919) 10월 26일의 일기에서 도쿄(東京) 오오이마치(大井町)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 히로구니(博邦)의 집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기차에서 송병준(宋秉畯)을 만났다고 적었다.

송병준은 '민병석(閔丙奭)과 윤덕영(尹德榮)의 (작위) 사직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분노하고 있다'고 구라토미에게 말했다. 송병준·민병석·윤덕영은 모두 한일강제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였다.

4일 뒤인 30일, 구라토미는 궁내성의 한 부서인 종질료(宗秩寮)에 갔다. 종질료란 황족과 왕족, 작위, 조선 귀족 등에 대한 일들을 다루는 곳으로 조선의 종친부와 비슷한 관청이었다. 그는 종질료의 고위 관료 센고쿠 마사유키(仙石政敬)를 만나 민병석·윤덕영의 사직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

"(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意)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 구라토미는 "데라우치가 얘기했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는 "당신은 이를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초대 조선총독(1910~1916)이자 일본 총리대신(1916~1918)을 지낸 데라우치와 고종 승하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독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언급된 것이다.

"고종, 파리 회의에 독립 청원 시도"

독살 건에 대한 구라토미의 문의는 집요했다. 10월 30일 센고쿠로부터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11월 1일 다시 종질료 관리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를 만나 "조선에서는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얘기하게 한 것이 있었는데 태왕이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입을 막는 수단으로서 태왕을 독살한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독살을 지시한 것이 데라우치였음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시하라는 이에 대해 "그런 풍설이 있다고 한다"며 정보를 알고 있음을 시인했다.

이틀 뒤인 3일 구라토미는 종질료의 다른 관리인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에게 또다시 고종 독살건에 대해 질문했다. 다나카는 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민병석·윤덕영·송병준 등이 태왕으로 하여금 서명 날인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독립이 될 듯하면 민 등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

"독살 진상 실토한 사람은 송병준"

이태진 교수는 "구라토미는 고종 독살의 정보를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민병석·윤덕영의 사직'이야기가 일기에서 처음 등장한 곳이 송병준을 만난 부분이며 다른 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라토미 등은 이 정보를 '풍문'이나 '풍설'인 것으로 언급하지만, 이것은 '뜬소문'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정보로 봐야 한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전한 사실은 일본 국가 최고 수뇌부의 인물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근거없이 쉽게 거론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시자인 데라우치와 전달자인 하세가와, 하수인 역할을 한 민병석·윤덕영과 이들의 전달자인 송병준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라토미가 궁내성의 상급자로서 종질료 관리들에게 거듭 이 문제를 캐물었고, 복수의 관원들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얻은 것도 이것이 '풍문' 수준을 뛰어넘는 정보였음을 시사한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일본인들은 상당히 근거 있는 정보라 해도 자신에게 책임이 올 것을 우려해,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려고 우회적으로 '풍문이 있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송병준은 왜 구라토미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전했던 것일까? 법제국 장관(1913~1916)을 지낸 구라토미는 궁내대신 하타노 다카나오(波多野敬直)와 가까운 정계의 실력자였다. 송병준은 작위를 잃게 된 민·윤 두 사람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그에게 독살의 진상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태진 교수는 말했다. 구라토미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데라우치 등 당시 총리들의 노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독살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 민족자결주의 후폭풍 우려"

만약 구라토미가 기록한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면, 일본은 왜 한국을 병합한 지 9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고종을 독살한 것일까? 이태진 교수는 기록에 등장한 '고종이 파리 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려 했다'는 부분을 주목한다.

고종 승하 직전에 열리기 시작한 파리 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국제회의로, 1917년부터 제창된 우드로 윌슨(Wilson)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대책을 세우던 중, 고종 황제가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것을 알고 협박 끝에 독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권 침탈의 두 주역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의 주역으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데라우치는 1919년 4월 12일 민족자결주의를 걱정하면서 3·1 운동에 대한 상세한 대책을 설파한 서신을 하세가와에게 보내기도 했다.

"시신의 팔다리가 붓고 혀가 닳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직후 전국에 번졌던 '독살설'은 3·1 운동 발발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고, 이를 믿은 국민들은 황제의 장례(3월 3일)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韓昌洙)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으며, 일각에선 자살설도 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선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아 '3·1 운동 당시의 소문' 정도로 치부돼 왔다.

고종 독살에 대한 당시 국내 기록으로는 윤치호(尹致昊)의 일기가 구체적인데, 이것은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閔泳達)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韓鎭昌)에게 한 말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윤치호는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고 적었다.

고종의 독살이 '해외 망명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운동가 선우훈(鮮于燻)은 광복 이후에 쓴 '사외비사(史外秘史)'에서 이지용(李址鎔)의 증언을 전했다. 고종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던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눠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장소가 그려진 보물지도를 신하에게 맡기고 탈출하기 직전에 정보가 샌 탓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상학과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내용이다.

by redcat100 | 2009/02/28 13:28 | 기사 모음 | 덧글(0)

‘조선국 독도에 도항금지’ 에도시대 팻말 日서 경매(경향신문, 2009. 2. 27)

일본 에도 막부시대에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명칭)는 조선국에 속해 있어 도항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적은 목재 팻말이 경매시장에 나온다.

산케이신문은 27일 “일본 동부지역에 사는 소유자가 팻말을 경매시장에 내놓았다”며 “최저 낙찰가격은 120만엔(약 1900만원)”이라고 보도했다. 팻말은 다음달 15일 교토에서 열리는 경매에서 공개입찰 방식으로 낙찰자를 정하게 된다.

“다케시마는 조선국에 속해 있어 도항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힌 일본 에도시대의 팻말. |산케이신문 제공

1837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팻말은 가로 77㎝, 세로 33㎝의 크기로 에치고 다카다번에 게시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막부가 이시미 하마다번상인들에게 “ ‘다케시마’로 건너가 밀무역을 할 경우 관계자를 처벌한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신문은 “에도 시대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고, 현재의 독도와는 다르다”며 “한국 측이 ‘다케시마’를 자국령이라고 주장할 때 종종 인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케시마문제연구고문인 스기하라 다카시(70)는 “이번 팻말이 한국에 넘어가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자료로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마네현 측은 “현재로서는 재정상황이 좋지 않아 낙찰받기가 어렵다”며 “한국 측이 값을 끌어올리면 경쟁할 수 없다”고 밝혔다.

by redcat100 | 2009/02/28 13:25 | 기사 모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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